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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진 장로, 춘천성시화운동을 증언하다
📅 2020.10.29👁 조회 223춘천성시화운동본부



조남진 장로, 춘천성시화운동을 증언하다
초교파 춘천성경구락부 시작 1972년 춘천성시화운동 발아 역할
김철영
조남진 장로(강원일보 사장 역임, 월드비전 춘천지부장 역임, 순복음춘천교회 원로장로)는 춘천 성시화운동의 산 증인이다. 더 나아가 한국과 세계로 확산된 성시화운동의 발아(發芽) 역할을 한 분이다.
▲ 춘천 성시화운동의 산 증인 조남진 장로(전 강원일보 사장) © 뉴스파워 자료사진
성시화운동은 1972년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당시 인구 10만 명의 호반의 도시 춘천실내체육관에서 ‘춘천 성시화운동 전도대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됐다. 춘천지역 교회들과 한국대학생선교회(CCC)가 공동으로 주최를 했다.
한국CCC 설립자이자 대표로 대학생선교를 모판으로 하여 민족복음화운동을 기획 주도했던 김준곤 목사가 [춘천 성시화운동 기획 노트]를 작성하여 칼빈이 사역했던 스위스 제네바와 같은 청정 도시, 민족복음화 이전에 한 도시를 송두리째 복음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비전을 품고 춘천성시화운동을 기획한 것이다.
김준곤 목사는 1970년 12월 31일 밤 0시 기독교방송(CBS)를 통해 “민족의 가슴마다 피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내용의 민족복음화운동을 선언하고 민족복음화운동이라는 선명하고도 푸른 깃발을 들었다.
그리고 1970년 12월 31일부터 1971년 1월 4일까지 서울농대 수원캠퍼스에서 열린 민족복음화 지도자 요원 강습회를 열었다. 당시 전국의 지도자 450명이 참석했다. 그 모임에 강원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조남진 장로도 참석했다.
▲ 춘천성시화운동 46년 춘천성시선교대회 후 자리를 함께 조남진 장로(좌측 맨 앞), 박인관 목사(우측 맨 앞) © 뉴스파워
조 장로는 “나는 1970년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조용기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치유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됐다. 늦게 예수를 믿다보니 성경을 잘 몰랐다. 그래서 춘천중앙감리교회에서 개설한 평신도신학원에 갔다가 강의를 하러 온 춘천CCC 대표간사 윤수길이 성령에 대해 강의를 했다. 강의를 잘 했다. 그 후 윤 간사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에서 윤수길 간사와 함께 4명이 성경공부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4명이 시작한 성경공부모임은 20~30명으로 늘었다. 성경공부모임의 명칭은 “춘천성경구락부”라고 했다. 당시는 구락부는 클럽이라는 의미다. 당시는 ‘4H 구락부’ 등 ‘구락부’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던 시대였다. 당시 멤버로는 문선재 교수(강원대 총장 역임, 소천), 이학규 장로(초등학교 교장 역임, 소천)
조 장로는 “그 모임에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신부도 초청해 강좌도 듣고, 한국예수전도단 설립자 오대원(David E. Ross)목사도 초청해 강의를 들었다.”며 “윤수길 간사가 춘천성경구락부에 대해 김준곤 목사님께 보고를 했다. 그러자 김 목사님께서 춘천에 오셨다.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평신도들이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며 격려하셨다. 그리고 춘천성시화운동을 기획하셨다.”고 회고했다.
▲ 감사패를 받은 조남진 장로(우측 세번째)와 이학규 장로(우측 두번째), 김인중 총재, 전용태 총재(맨 우측), 양인평 대표회장(맨 좌측) ©뉴스파워 자료사진
김준곤 목사는 민족 복음화 이전에 한 도시만이라도 송두리째 복음화 되기를 꿈꾸면서 춘천 성시화운동 전략을 담은 <춘천 성시화운동 기획 노트>를 만들었다. 4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에 담긴 비전과 전략은 춘천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도 기도하면서 비전으로 품고 실행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단순히 시민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을 뛰어 넘어 한 도시를 복음으로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전복음(The Whole Gospel, 복음전도와 사랑의 실천, 사회책임)을 담고 있다.
김준곤 목사가 그런 구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장로회신학교 제1회로 졸업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장로교는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정립한 신학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교파일 뿐만 아니라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에 망명하여 목회를 하면서 성경을 제네나 시민들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고자 시도했던 제네바 개혁운동을 교회사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 1972년 춘천성시화운동 전도대회 ©뉴스파워 자료사진
특히 아름다운 산과 레만호수가 있는 제네바처럼 당시 인구 10만 명의 춘천도 호반의 도시이자 아름다운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청정도시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972년 춘천성시화운동 전도대회 당시 춘천(중고등)학생연합회 회장을 맡아 전도대회 안내를 맡았던 박인관 목사(광염감리교회, 춘천성시화운동본부 이사장)는 “당시 춘천의 기독교는 크게 부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고등학생들도 신앙 열정이 대단했다.”고 했다.)
김준곤 목사는 1971년 8월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1만 명 민족복음화요원 강습회’를 열었다. 민족복음화운동의 열기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 빌 브라잇 박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 김준곤 목사(왼쪽부터) ©뉴스파워 자료사진
춘천 성시화운동 전략노트를 만든 김 목사는 1972년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